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이재명 명예교수가 발전기금 5백만 원을 쾌척했다. 이 명예교수는 희곡계의 거장으로, 평민사의 공연예술신서를 기획하고 희곡 관련 다양한 책들을 집필하고 24년간 명지대에 몸담으며 제자 양성과 발굴에 힘썼다. 30년 넘게 동안 한국 희곡 관련해 연구와 업적을 다채롭게 쌓은 이재명 명예교수를 만나 발전기금을 쾌척하게 된 계기와 더불어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눠보았다.
1.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재명 교수님께서는 퇴직하시면서 명지대학교를 위해 발전기금으로 5백만 원을 쾌척하셨는데요, 발전기금을 쾌척하시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정년을 2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년이 우리 학과 30주년이 되는 해인데요. 2년을 더 근무했다면 중요한 30주년 행사를 성황리에 마치고 정년을 맞이했을 텐데, 저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신변상의 이유로 그만두게 되어서 아쉬운 마음에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내년 행사를 잘 준비할 수 있게끔 불쏘시개의 역할을 한 것이죠. 제가 먼저 행사를 위한 기금을 마련해 기부를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 듯 해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기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은 이벤트를 기획했습니다. 두 가지였는데요, 하나는 제자들과 같이 명예퇴임 기념식 행사를 진행하면서 그때 참석한 교수, 선후배, 제자들에게 ‘올 때 3만원씩만 갖고 와라’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그때 모인 3만원으로 이번 발전기금을 낼 수 있었어요. 제가 낸 금액의 3분의 1은 제자들과 더불어 제 명예퇴임식 행사 때 와 주신 분들이 제게 맡겨주신 돈이에요. 두 번째로는 제가 24년 동안 명지대에 몸담았었고, 연구자로서는 10년 정도 연구를 했어요. 30년 넘게 한국 희곡, 희곡론을 연구하면서 모았던 자료가 굉장히 많습니다. 연구자 대부분이 자신이 해왔던 학문적 업적에 자부심을 갖기 마련이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론을 집대성해서 자기이름으로 저서를 내는 일이 쉽지 않은데, 저는 수많은 저서를 편찬해내며 일종의 토대 연구를 진행해왔습니다. 아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부분에 토대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원자료를 모아서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연구였습니다. 2004년도에 학진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 당시 최고액인 2억 6천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 인문캠퍼스에서 최고액이었을 거예요. 연구소 개념에서는 더 받은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 연구자 중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죠. 그 연구비를 받아서 토대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개인연구 하면서 4000만원을 받는 등 총 3억 원의 학진 연구비를 받았으니 나름대로 연구에서 꽤 많은 성과를 냈죠. 그 과정에서 책을 총 15권정도 만들었습니다. 15권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작품들을 수집하고 선별해야했는데, 그러다보니 제가 모은 자료들이 상당했죠. 국내에서 쉽게 모을 수 없는 자료들도 한 가득이었습니다. 우리 대학 설립자님께서 옛날 통일부장관을 하셔서, 북한 쪽 관련 자료들이 우리 대학에 좀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어떻게 보면 제가 유일하게 북한쪽 원전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죠. 우리 옛날 자료를 찾기 위해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과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연변대학 도서관과 모스크바 국립중앙도서관, 뉴욕과 콜롬비아, 시애틀, 워싱턴 등의 여러 대학 도서관을 방문해 자료를 전부 복사해왔어요. 의외로 저런 곳에 숨겨진 자료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론서를 써내기 위해 참고한 자료가 백 권은 족히 넘을 겁니다. 외국 원서들 또한 비교적 많이 모은 편인데, 제가 눈이 나빠져 더 이상 옛날 활자를 읽지 못할 정도가 되었어요. 한쪽 눈이 많이 안 좋아져서, 이 많은 자료들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다가 후학 동료들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은퇴하시고 나서는 책을 다 가져가서 서재에 놓거나 연구실을 따로 꾸리시는 경우가 꽤 있는데, 저는 훗날 연구에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제일 좋게 활용할 수 있는 법이 뭘까 고민한 끝에 1차적으로는 직계제자들, 우리 대학에 있는 제자들과 동료 교수님들께 나눠주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자료가 많이 남아서, 외부 후학들에게 연락해 ‘자료가 있는데 원하는 사람 가져가라’고 연락을 하면서 단서를 달았어요. 나는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나눠주고 싶으나, 공짜는 의미가 없다. 조금이라도 성의를 표시하면 그 성의를 모아 학과발전기금으로 내겠다, 라고요. 그래서 일부 기금이 모아졌죠.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까 제 퇴임기념 모임에서 대략 한 150만원에서 160만 원 정도 모아졌고, 책 자료들을 나눠주면서 한 100만원 좀 안되게 기부금이 모아졌습니다. 여기에 제 개인 돈을 합쳐서 모양새 있게 500만원을 만들어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2. 문예창작학과를 위해 발전기금을 쾌척하셨는데, 기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하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년이 문예창작학과가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10주년 행사 할 때는 한창 IT 붐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우리 학과 출신 제자들이 당시 IT 업계를 설립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친구들이 있었죠. ‘이태관’이라는 제자가 당시 200만 원 정도의 돈을 쾌척했습니다. 2000년대라는 것을 감안해보았을 때, 지금의 금액으로 환산해보자면 최소 500만 원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큰돈이었죠. 그 돈으로 학과 10주년 기념 문집도 만들고, 학과의 학회 행사도 지원했습니다. 동문들과 재학생, 교수님들이 모여 식사도 같이 한번 했죠. 이 모든 비용을 당시 200만원으로 거의 다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10주년 행사는 교수님들이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잘 해냈는데, 20주년 행사부터는 사정이 조금 어려워졌죠. 이런 행사에 돈을 흔쾌히 낼 수 있는 여건이 잘 마련되지 않아서, 2007년도부터 우리 교수들이 한번 준비해보자, 마음먹고 외부 심사 나가서 받은 심사비를 십시일반 모았습니다. 학과 교수님들이 이렇게 조금씩 모아둔 돈을 바탕으로 20주년 행사를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주년 때에는 문집을 만들지 못했죠. 대신 홈커밍데이처럼, 학과 동문들을 다 모아 학생회관 식당을 빌려 크게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런 사정이 있다 보니 30주년 행사는 이전 행사들보다 크고 내실 있는 행사가 되길 바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문집은 한 권 나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또 그동안 학과 행사들과 학회 행사들이 굉장히 활발했는데, 영화와 시, 소설 등의 학회를 통해 선후배 관계가 끈끈하게 잘 유지되었죠. 이 학회 행사들도 다시 복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기부가 시작이 되어서, 더 많은 기금들이 모아지면 홈커밍데이도 다시 추진되었으면 합니다.
3. 교수님께서는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하시면서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실력으로 뛰어난 공적을 쌓으셨는데요.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시면서 교수님만의 가치관이 생기셨을 듯합니다. 이에 대해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이 부분은 제가 수업시간에 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희극, 코미디를 떠올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TV에서 하는 말도 안 되는, 웃기기 위해 웃음을 강요하는 것들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희곡, 코미디’는 사회학적으로 굉장히 고차원적인 이론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알라존’과 ‘에이런’입니다. ‘알라존’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고, ‘에이런’은 아직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희곡은 알라존 대 에이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기득권을 가진 사람 대 젊은 세대의 갈등과 대립으로 표현되는 게 희극입니다. 희극은 보통 ‘에이런’의 승리로 끝납니다. ‘에이런’은 결국 신세대예요. 기득권을 가진 ‘알라존’이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지려고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이 신세대인 ‘에이런’의 지략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말죠. 이것이 희극의 구조인데, 저는 이 부분을 알기 때문에 저 스스로 ‘알라존’과 같은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내 식대로 살아야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에이런’들이 어떻게 앞으로 더 잘 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나를 우선시하기보다, 제자들과 후학들을 먼저라고 생각하는 입장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과 입장을 수업 시작할 때나 수업 중간에 꼭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에이런이라고 생각한다. 에이런 어원이 아이러니다. 왜 아이러니냐, 미래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한데 현재로서는 못 갖추고 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앞으로 여러분의 가능성은 활짝 열려있다’고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유명한 소설가, 평론가, 시인에 기죽지 말고 너희들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고요. 그런 싹을 품고 있다고 늘 격려를 하는 편입니다. 이런 격려가 학생들에게 좋은 씨앗이 되어서, 학생들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4. 교직에 오래 몸담고 계시면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이 생기셨을 듯합니다.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일화 몇 가지만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퇴임을 기념하는 모임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제일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바로 제자들이 잘됐다고 연락이 올 때예요. 매년 1월 1일에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보통 당선 연락은 크리스마스 전후로 옵니다. 신춘문예에 투고한 친구들 또한 이 시기에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고 있겠지만, 저 또한 연락이 누구한테서 올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신춘문예는 보통 시, 소설, 희곡, 평론, 아동문학 등의 분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5년 전쯤, 명지대 문창과에서 아동문학을 제외하고 네 가지 영역에서 신춘문예를 휩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일화죠. 그동안 희곡이 다른 장르에 비해 등단자가 적었어요. 그런데 저 때 물꼬를 튼 뒤로 제 직계 제자들이 계속해서 희곡 작가로 등단을 하고 데뷔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희곡은 아니어도 영화나 TV 드라마 작가 쪽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좋은 업적을 쌓고 있는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부모입장에서는 자식이 잘 되는 게 제일 기쁜 것처럼, 교수입장에서는 제자들이 잘 됐을 때 제일 기쁩니다.
5. 학업에 열중하며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수업시간 중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속된 표현일 수 있지만, ‘작품은 엉덩이로 쓴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인 즉 작품은 꾸준히 써야하고, 꾸준히 쓰기 위해선 책상에 오래 앉아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엉덩이를 책상에 붙이고 앉아서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습작을 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나눠집니다. 얼마나 길게 앉아 있었냐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규칙적으로 오래 앉아있는 게 중요합니다.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 중 하나가 일본 유명 작가 하루키 이야기인데, 하루키의 일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침 9시에 출근하듯이 하루키 또한 자기 창작실로 아침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늘 유지한다고 합니다. 이런 꾸준함에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머리에서 번쩍 떠오르는 게 있어서 작품이 나오는 건 절대 아니지요. 옛날에는 영감론이라고, 창작의 원천이 영감이라고 믿는 시대가 있었는데 요즘은 절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봅니다. 많은 학생들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딱 뭐가 번개처럼 떠올랐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좋은 작품이 나오진 않습니다. 작품을 많이 읽고, 보고, 생각을 많이 한 뒤 작품을 많이 써야 좋은 글이 나옵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야 합니다. 이 ‘삼다’가 문창과 학생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방향이자 방침이죠.
6. 모교에게 바라는 점이나, 교수님의 향후 계획 또는 바람이 있다면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일단 학교에 바라는 점은, 아무래도 역시 문예창작가를 좀 더 위해달라는 점이죠. 현재의 많은 매체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 하곤 하죠. 이에 인문대학도 위기에 놓여있는 게 사실이지만, 명지대 문창과는 정말 특별한 존재이기에 다른 시각으로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문창과 졸업생들이 지금 바로 당장 눈에 보이는 취업, 네 가지 보험이 해당되는 취직에 있어서는 당연히 취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년, 10년이 지났을 땐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성공한 졸업생들이 꽤 있을 겁니다. 실제로도 명지대 문창과 졸업생 중에 성공한 졸업생들이 다분하고요. 그렇기에 조금 더 문창과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교수직을 내려놓는 상황에서도 제일 간절합니다.
제 개인적인 포부로는, 그동안 연구나 제자 양성에 힘쓰느라 눈을 너무 혹사해 눈을 안정화하는 과정을 1년 이상 겪게 되면서 살이 많이 쪘어요. 눈에 충격이 오면 안 된다고 해서 운동도 못하게 되어 살이 많이 쪘는데, 살을 좀 빼서 건강한 몸매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운동을 조금씩 해도 된다고 해서, 일주일에 두 번이나 세 번 정도는 땀을 흘리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론을 집대성하다가 눈을 혹사하게 되었는데,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입니다. 제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이 대부분 옛날 자료들이라 복사를 하려고 하면 책들이 다 바스러졌어요. 낡아서 책이 바스러지니, 최대한 잘 펴서 복사를 해 왔죠. 당시 책이 손바닥 크기였거든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쓰인 책들이 대부분이라, 이런 책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다 보니 눈이 쉽게 피로해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열정적으로 연구를 해서, 어느 정도의 연구 성과를 이뤄내고 후학들이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게 연구자로서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운명이고 숙명이었죠. 최근 교수직을 내려놓기 전에 연구와 업적을 완수했다는 것도, 제게는 참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