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당시 금속활자 발굴의 주역인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사학과 95)을 만나다!

  • 작성일2021.08.30
  • 수정일2021.08.30
  • 작성자 김*현
  • 조회수547
한글 창제 당시 금속활자 발굴의 주역인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사학과 95)을 만나다! 첨부 이미지

지난 6월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 유적에서 한글 금속활자 1,600여 점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해당 유적의 발굴조사를 담당한 수도문물연구원은 우리 학교 오경택 동문이 2017년에 개원한 매장 문화재 조사기관이다. 오 동문은 1995년 명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2001년 학부졸업, 2004년 사학과 일반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 후, 현재 매장문화재 조사 전문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을 개원해 전국에 매장되어 있는 문화재를 발굴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고고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바탕으로 연구원을 운영하며, 지난 6백 년간 땅속에 묻혀있던 역사적 발굴을 지휘한 오경택 동문을 만나 보았다.

 

 

Q.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동문께서는 현재 수도문물연구원장으로 활약하고 계시는데요. 본인 소개와 더불어 ()수도문물연구원에 대해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는 명지대학교 사학과 95학번 오경택입니다. 25년 가까이 각종 문화재 조사에 종사해 왔고, 직접 연구원을 개원한 지는 만으로 4년 정도 되었습니다. 우리 수도문물연구원은 비영리 재단 법인으로, 주로 전국에 있는 매장 문화재를 구제발굴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구제발굴은 공사나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땅속에 있는 문화재가 불가피하게 훼손될 경우를 대비해, 공사에 앞서 미리 문화재를 발굴하는 것을 말합니다. 연구원들은 대략 서른 명 정도가 되는데, 그중 상당수가 명지대학교 사학과, 미술사학과, 건축과 출신 학생들입니다.

 

Q. 최근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에서 금속활자를 비롯한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는데요. 발굴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발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A. 당시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에서 매장 문화재에 대한 구제발굴이 필요했어요. 발굴조사 시에는 사업주가 직접 조사기관을 선택하는데, 전국 150여 개 기관 가운데 서울지역 조사에 특화된 우리 수도문물연구원과 한울문화재연구원이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작년 3월부터 유적을 조사하던 중, 61일경 땅속에서 가지런히 늘어져 있는 총통(銃筒)들을 발견했어요. 그것들을 걷어내 수습하고 나니, 그 아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물시계의 부속품인 주전(籌箭), 동종(銅鐘) 등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마한 도기 항아리가 있었죠. 오랜 시간 토압에 눌려 금이 가 있었는데, 항아리 옆구리의 조각이 툭 떨어지면서 공깃돌 같은 파편 두세 개가 같이 떨어졌어요. 이게 뭔가 싶어서 씻어봤더니 다름 아닌 금속활자였어요. 당시 발견장소가 조선 초기 도성 안 민가 터의 땅속이었는데, 금속활자는 조선 전기의 것이 거의 없어요. 사안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항아리를 수습해 연구원으로 옮겨 집중분석작업에 돌입했죠. 전문가들의 판독 결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였어요. 후에 과학사와 활자 연구하시는 분들이 찾아와 출토된 유물들을 보시더니, ‘이건 국보급이다’ ‘생전에 실물을 볼 줄은 몰랐다라며 놀라셨어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우리 연구원에도 수장고 시설이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문화재청에 보고 후 고궁박물관 수장고로 이전하게 되었어요. 현재 출토 유물들은 고궁박물관에 다 보관되어 있고요. 다가올 11월부터 짧게나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전을 통해 공개될 예정입니다.

 

Q. 대체 누가 왜 그 많은 유물을 한 곳에 묻어놓은 것일까요?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서울 도심부는 조선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층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도시이니만큼, 매납 유적이 출토된 사례가 제법 많아요. 이번 인사동 피맛골 재개발 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금속 유물이에요. 오늘날도 금속기가 귀한데, 조선 시대 당시에도 구리는 굉장히 비싼 금속이었어요. 출토품들이 당시에 재화, 즉 값나가는 물건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어요. 출토품들 가운데 가장 시기가 늦은 유물이 1588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출토품들이 일러도 1588년 이후에 묻혔다는 뜻이에요. 정황상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상당히 가깝다 보니, 누군가 전란을 맞아 유물들을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피난을 갔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다 전란으로 돌아가셔서 다시 활용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이번 사례가 이례적인 것은 수습한 유물들이 일반 민가에서는 소유할 수 없는 물건들인 데다, 무더기로 매장되어 있었다는 점이에요. 추가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금속활자들을 제외한 출토품들이 전부 다 잘게 잘린 채 파편으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것을 나중에 다시 녹여 재활용하려고 했다가 녹여지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사학과 후배들을 비롯한 청년 세대를 위해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대학 동기 중에 현재 미술사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가 있어요. 당시 그 친구는 사학과 출신으로는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고, 저도 역시 고고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먼저 이 분야에 진출한 동문들이 없어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애를 먹고 있었어요. 그때 그 친구와 나눈 얘기가 있는데, 우리가 하려는 일이 너무 무모하지만, 나중에 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을 위해 디딤돌이 되어주자는 거였어요. 적어도 후배들이 해당 분야에 뜻이 생겼을 때 찾아갈 사람이 한 명씩은 있도록요. 처음에는 좌충우돌 몸으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직접 부딪치는 방법밖에는 몰라서 소위 젖동냥을 하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부를 했어요. 제 경우에는 그것들이 성과로 이어지기까지 약 15년이 걸렸고요. 그런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전공을 막론하고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힘들다는 방증이겠지만, 저는 나라의 인재들이 모두 공무원이 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나라의 미래는 필연적으로 암울하리라 생각해요. 그러니 후배분들은 각자의 전공과 적성을 고려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혹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했으면 좋겠어요.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제는 사회 곳곳에 우리 동문이 많이 있으니, 명지인으로서 자부심을 품고 뜻한 바를 이루어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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